AI와 일하다 보니 관점이 바뀌었다. 논문 쓰는 행위를 다르게 보게 됐다. 이 글은 그 관점 전환에 대한 기록이다.
AI와 일하다 보니 관점이 바뀌었다
Claude와 티키타카하며 연구하다 보니, 많은 걸 컴퓨터적 관점으로 보게 됐다. 파일 시스템, 인덱싱, 프로그레시브 디스클로저 같은 개념이 연구 워크플로우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내 연구 자료를 정리하는 방식도, AI에게 맥락을 전달하는 방식도 바뀌었다.
논문 쓰는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LangExtract — 글을 구조로 파싱하다
Google이 2025년 7월에 공개한 오픈소스 라이브러리 LangExtract(google/langextract, Apache-2.0)가 있다. LLM을 활용해 비정형 텍스트에서 구조화된 정보를 추출(extraction)하는 도구다. 사전 정의된 스키마에 맞춰 텍스트를 처리하고, 추출된 정보가 원문의 어디에서 왔는지까지 매핑한다. source grounding이라고 부르는 기능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해한 방식으로 풀어보자면, 이 라이브러리가 하는 건 렌더링된 텍스트를 구조로 파싱(parsing)하는 것이다. 완성된 글이 입력이고, 그 안의 구조화된 정보가 출력이다.
논문 쓰기 = 파싱의 역방향
내가 하는 건 그 반대다.
논증 구조가 입력이고, 완성된 글이 출력이다. 구조를 글로 렌더링(rendering)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논문 쓰기를 흰 바탕에 문장을 써내려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커서가 깜빡이는 빈 문서 앞에서,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순서대로 써나가는 것. 잘 안 써지면 고치고, 고치다 보면 앞뒤가 안 맞고, 다시 처음부터 읽으며 흐름을 잡고.
이제는 논문 쓰기를 하나의 논증 아키텍쳐를 구축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뼈대를 세우고, 장의 논증 과업을 정의하고, 절별 논점을 배치하고, 소절마다 전개 전략을 설계하고, 단락 하나하나에 들어갈 내용과 근거 사료를 지정한다. 장→절→소절→논점→단락→문장 수준까지 점점 구체화해가는 과정이다. 이 구조가 충분히 견고해지면, 그때 비로소 문체를 입혀서 줄글의 형태로 렌더링한다.
ARGUMENT.md
논증의 아키텍쳐를 담고 있는 문서가 ARGUMENT.md다. 박사논문의 각 장마다 하나씩 만들고 있다.

목차만 봐도 장/절/소절 단위의 논증 구조가 드러난다. 그런데 이 문서의 진짜 밀도는 소절 안쪽에 있다.

소절 하나를 열어보면, 단락 단위까지 논점과 전개가 개조식으로 정리되어 있다. §A, ¶1, ¶2… 이런 식으로, 각 단락에서 무엇을 주장하고 어떤 근거를 대고 어떤 순서로 전개할지가 문장 수준에 가깝게 잡혀 있다. 한 장의 ARGUMENT.md가 약 1,000행이다.
이게 사실상 논문이다. 글로 렌더링되기 전 상태의.
초고 렌더링
아키텍처가 문장 수준까지 잡혀 있으면, 초고 렌더링을 AI에게 맡길 수 있다.
ARGUMENT.md의 개조식 구조를 입력으로 주고, 학술 논문의 형태로 렌더링하게 하는 것이다. 이미 단락마다 논점·근거·전개 순서가 지정되어 있으니, AI가 해야 할 일은 이 구조를 문장으로 풀어쓰는 것이다.
이건 흰 바탕의 공포를 없애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깜빡이는 커서 앞에서 첫 문장을 고민하는 대신, 렌더링된 초고 위에서 연결부를 다듬고 표현을 수정하며 글쓰기를 시작한다. 시작점이 달라지는 것이다.
물론 초고는 초고일 뿐이다. 렌더링된 결과물을 그대로 쓰는 일은 없다. 모든 문장을 직접 읽고, 논증 흐름을 확인하고, 표현을 내 것으로 바꾼다. 글쓰기 자체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글쓰기의 시작점을 바꾸는 것이다.
논증 아키텍쳐 + 렌더링이라는 관점이 가능하게 하는 것
같은 논증 아키텍처를 두고, 문체와 형식만 바꾸면 다양한 컨텐츠를 만들 수 있다. 학술 논문의 문체로 렌더링하면 논문이 되고, 강의용 구어체로 렌더링하면 강의록이 되고, 블로그 톤으로 렌더링하면 포스팅이 된다.
반드시 텍스트로 렌더링할 필요도 없다. 논점별로 좌표값과 RGB값을 매기면 3D 형태의 이미지로 렌더링할 수도 있다. 시간값을 주면 영상으로 플레이할 수도 있다. (언젠가는 각자의 박사논문을 오감으로 감상할 수 있는 형태로 보여주는 쇼케이스가 열릴지도…)
소스는 하나인데 출력이 여럿이니, OSMU — One Source Multi Use 프레임워크와도 호응한다. 졸업하면 마주해야 할, Publish or Perish 생태계에서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